사도행전 13장에서 시작된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은 14장에 이르러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와 같은 극적인 상황을 맞이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기적과 부흥이라는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동시에 생명을 위협받는 치열한 박해와 고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은 하루아침에 신으로 추앙받다가 다음 날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바울의 극적인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결코 복음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사도들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진정한 사역의 성공이 무엇이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사도행전 14장의 뜨거운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이고니온: 복음이 가져온 두 가지 반응과 담대함 (14:1-7)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평소처럼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 결과 허다한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도시가 두 무리로 나뉘어 분열되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사도들의 반응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행 14:3)
그들은 위협을 피해 곧바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오래 머물며' 주님을 의지하여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로 그들의 메시지가 진리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구체적인 암살 계획을 꾸미게 됩니다. 이를 알아챈 사도들은 순교의 때가 아직 아님을 분별하고,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 그리고 그 근방으로 피신하여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2. 루스드라: 헛된 영광을 거절하고 돌팔매를 맞다 (14:8-20)
루스드라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지체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니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칩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자, 루스드라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바나바를 신들의 왕인 '쓰스(제우스)'라 부르고, 주로 말을 전하는 바울을 전령의 신 '허메(헤르메스)'라 부르며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고 열광했습니다. 급기야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져와 사도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했습니다.
가장 위험한 유혹의 순간이었습니다. 박해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사람들의 거짓된 칭송과 영광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행 14:14-15)
그들은 극도의 슬픔과 분노, 혹은 신성모독을 대할 때 유대인들이 하는 행동인 '옷을 찢는' 행위를 하며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신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일 뿐이며, 천지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향하는 영광을 철저히 거부하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높였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됩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바울을 죽이려고 쫓아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한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사도들을 신으로 모시려던 군중은 유대인들의 꾐에 넘어가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시체를 성 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인간의 환호가 얼마나 가볍고 쉽게 변하는지,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길이 얼마나 처절한 고난의 연속인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장면입니다.
3. 다시 고난의 현장으로: 제자들을 굳게 세우다 (14:21-28)
돌에 맞아 의식을 잃었던 바울은 제자들이 그를 둘러섰을 때 기적적으로 털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제자를 삼습니다.
이후 바울과 바나바의 행보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더베에서 파송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려면 동쪽으로 가면 훨씬 안전하고 빠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핍박하고 돌로 쳤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비시디아)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위험한 도시에 왜 다시 들어간 것일까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22)
갓 믿음을 가진 초신자들을 격려하고 굳게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온몸에 돌에 맞은 상처와 멍이 가득한 채로 제자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처럼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바울의 상처 입은 모습 그 자체가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이후 사도들은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고 기도와 금식으로 그들을 주님께 위탁한 뒤, 마침내 출발지였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합니다. 그들은 교회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벅찬 가슴으로 보고하며 제1차 전도 여행을 은혜롭게 마무리합니다.
핵심 단어 연구 (Key Word Study)
- 허메와 쓰스 (Hermes and Zeus): 로마 신화의 헤르메스와 제우스입니다. 루스드라 지역에는 과거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누추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마을을 방문했을 때 박대했던 자들은 심판을 받고, 대접했던 자는 복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적을 본 무리가 사도들을 신으로 오해하고 제사하려 했던 것입니다.
- 옷을 찢다 (Tear clothes): 유대 문화권에서 참을 수 없는 슬픔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신성모독을 목격했을 때 보여주는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사도들이 사람들의 찬사를 얼마나 끔찍한 영적 타락으로 여겼는지 보여줍니다.
- 환난 (Hardships/Tribulations): 헬라어로 '들립시스(thlipsis)'이며, 짓누르다, 압박하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은 비정상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수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묵상과 적용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강력한 도전을 던져줍니다.
첫째, 성공과 영광의 유혹 앞에서 내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루스드라의 군중이 바울을 신으로 떠받들었을 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옷을 찢으며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가 한 작은 봉사나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때, 그 영광을 은근슬쩍 가로채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영광을 마땅히 받으실 창조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겸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둘째, 상처를 품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헌신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바울은 자신을 핍박했던 그 위험한 도시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오직 연약한 성도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편안함과 안전보다, 한 영혼을 세우는 일을 더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이해할 수 없는 환난과 억울하게 맞는 '돌팔매질'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증명하는 훈장이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묵묵히 걸어가는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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